광부의 기억 잇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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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의 기억 잇는 벽

광산 사택촌에서 시작된 이야기

2026년 10월 마지막 주말, 강원 태백시 상장동 어깨동무길은 분필 가루와 물감 냄새로 채워졌다. 제3회 상장벽화축제가 열린 현장에서는 어린이와 주민, 방문객이 긴 벽과 바닥에 손도장과 그림을 남기며 마을의 새로운 풍경을 함께 만들었다.

상장벽화축제의 중심에는 광부의 마을이었던 상장동의 기억이 놓여 있다. 상장동은 1970년대 함태탄광과 동해산업에서 일한 광부 약 4천 명이 살았던 태백의 대표적인 광산 사택촌이다. 문곡역 저탄장 옆으로 집과 대폿집이 줄지어 있던 번화가였지만, 석탄산업이 저물면서 주민들이 떠났고 한창때 인구의 10분의 1 수준인 약 400명이 마을을 지켰다.

남은 주민들은 2011년 직접 붓을 들었다. 전문 화가가 아닌 마을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와 도시락을 나누는 동료,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담벼락에 그렸다. 그 결과 상장동 남부마을은 광부의 삶을 담은 전국 유일의 벽화마을로 자리 잡았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상장동주민센터가 출품한 ‘전설이 흐르고 추억이 그려지는 상장동 이야기마을’이 대한민국 국토도시디자인대전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주민들이 스스로 기록한 탄광촌의 생활사가 마을 공간에 남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축제는 왜 어깨동무길에서 열렸나

이번 행사는 기존 남부마을 벽화 구역이 아니라 철길 옆 어깨동무길에서 진행됐다. 남부마을 벽화는 조성된 지 15년 가까이 됐고, 현장은 좁고 가파른 주택가 골목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도 주민들이 생활하는 집의 담벼락인 만큼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모이는 행사를 열기에는 조심스러운 공간이다.

행사 명칭도 ‘벽화마을축제’가 아닌 ‘상장벽화축제’다. 기존 벽화마을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른 공간에 새로운 그림을 더한다는 구성이 이름에 담겼다.

어깨동무길은 태백선 철로와 황지주공2차아파트·연립주택 사이에 조성된 약 400m 길이의 직선 골목이다. 한쪽에는 철로변의 긴 벽이 이어지고 다른 쪽에는 아파트가 자리한다. 건널목에서 들어가 길 끝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일방향 구조여서 행사 동선을 구성하기에 알맞고, 철로변 벽 전체를 그림을 위한 넓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존 벽화를 지우거나 바꾸지 않고, 광부 마을의 기억을 어깨동무길의 새 벽으로 이어 그리는 것이 축제의 핵심이다. 남부마을에 남은 과거의 벽과 어깨동무길에 더해진 오늘의 그림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축제 캐릭터 두무리

제3회 축제에는 ‘두무리’라는 캐릭터도 등장했다. 이름은 어깨동무길의 ‘동무’에서 따왔다. 광부 안전모를 쓰고 한 손에 분필을 든 둥근 모습의 어린이 캐릭터다.

축제장 안내판에는 두무리가 오래된 것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오늘의 이야기를 하나 더 그린다는 취지의 설명이 제시됐다. 이는 상장동의 과거를 보존하면서 현재 주민과 방문객의 흔적을 새로운 벽에 보태려는 축제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줬다.

현장 포토존에서는 어린이들이 두무리와 사진을 남기기 위해 차례를 기다렸다. 광부의 안전모와 분필을 함께 표현한 캐릭터는 탄광촌의 역사와 어린이 중심의 벽화 체험을 자연스럽게 잇는 상징으로 활용됐다.

누구나 색을 더한 긴 벽

어깨동무길 입구부터 철로변 벽을 따라 여러 체험 구간이 이어졌다. 손에 물감을 묻혀 자국을 남기는 핸드페인팅 손도장 구간을 비롯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프리아트 낙서존, 바닥에 분필로 표현하는 초크아트, 준비된 밑그림에 색을 입히는 컬러링 월이 마련됐다.

완성된 전문가 작품을 감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행사장을 찾은 사람이 직접 색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2011년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손수 붓을 들었던 남부마을 벽화의 조성 과정이 이번 축제의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이어진 셈이다.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그림그리기가 진행됐다. 아이들은 벽과 바닥을 화폭으로 삼아 각자의 그림을 남겼고, 보호자와 주민들은 그 과정을 지켜봤다. 흰 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손도장과 선명한 색, 크고 작은 그림으로 채워졌다.

지역 공방이 참여한 체험부스도 운영됐다. 태백종이문화원은 미니어처 도시락 만들기를 선보였고, 꿈꾸는 초록공방은 슈링클 키링, 빛그림은 한지 연필통, 매일매듭은 걱정인형 볼펜 키링 체험을 마련했다. 한국문화센터 태백지부에서는 손수건 천연염색을 진행했다.

‘함께 만드는 우리 마을’ 코너에는 타일아트와 병뚜껑아트, 컵조명 체험이 준비됐다. 서로 다른 재료를 이용한 프로그램이 한 공간에 배치되면서 벽화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공예로 마을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지역 상점과 주민이 채운 잔치

먹거리 장터에는 정태화 로드스넥, 장군바베큐, 곰도리네, 시우네분식, 정고집, 소묵소묵, 구구치킨, 언니네청과 등 상장동과 태백의 가게들이 참여했다.

닭꼬치와 모둠바베큐, 떡볶이, 도토리묵사발, 치킨, 자른 과일 등 다양한 음식이 판매됐다. 길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서는 방문객들이 음식을 나눠 먹었고, 벽화를 그리던 어린이와 주민들이 잠시 쉬어 가며 동네 잔치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아버지 노래자랑’이 열렸다. 광부의 삶과 가족의 기억을 간직한 마을에서 아버지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그림으로 남은 광부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실제 주민들의 노래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금요일 저녁 축하공연에는 이용기, 이우리, 공미소, 김선영이 무대에 올랐다. 토요일에는 라인댄스와 팝송영어 공연이 이어졌다. 체험과 먹거리, 주민 공연이 어우러지면서 어깨동무길은 행사 기간 동안 걷는 골목이자 그림을 만드는 작업장, 주민이 함께 즐기는 무대로 활용됐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남은 그림

행사는 마무리됐지만 어깨동무길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손도장과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널목 쪽에서 길에 들어가 북쪽 연립주택 방향으로 걸어 나오면 약 10분 만에 둘러볼 수 있다.

어깨동무길에서 차량으로 약 5분 거리에는 원조 벽화마을인 상장동 남부마을이 자리한다. 두 공간을 함께 살펴보면 2011년 주민들이 그린 광부의 삶과 2026년 축제 참가자들이 더한 오늘의 그림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남부마을은 관광 시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주거지다. 벽화를 둘러볼 때는 큰 소음을 내거나 사유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조용히 이동해야 한다.

제3회 상장벽화축제는 오래된 벽을 지키면서 새로운 벽에 현재의 이야기를 보탠 행사였다. 탄광 산업의 전성기와 쇠퇴, 주민들이 직접 시작한 벽화 작업, 어린이와 지역 상점이 참여한 축제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남부마을의 벽화가 광부들의 삶을 기록한다면, 어깨동무길의 벽화는 그 기억을 이어받은 오늘의 상장동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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