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가을, 안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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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가을, 안전을 걷다

마을의 일상에 스며든 가을

10월 하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정라동의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에는 가을빛이 천천히 번진다. 아직 초록을 간직한 나무 사이로 노란색과 붉은색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잔디밭에는 낙엽이 한두 장씩 내려앉는다. 높고 맑은 하늘 아래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도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

삼척을 떠올리면 푸른 동해와 해안 절경이 먼저 생각나지만, 마을 안쪽에는 자연과 주민의 일상이 맞닿은 공간도 자리하고 있다.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은 잘 정비된 산책로와 정자, 나무다리, 작은 쉼터가 이어져 겉으로는 친근한 동네 공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의 출발점에는 자연재해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생활공간을 지키려는 목적이 놓여 있다.

침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재 공간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이 있는 정라지구는 과거 집중호우로 침수 피해를 겪었다. 주변에서 흘러든 빗물이 낮은 지대로 모이는 지형이어서 재해를 예방할 시설이 필요했다. 이에 정라지구는 2008년 방재시범마을 대상지로 선정됐고, 저류시설과 생태공간을 함께 조성하는 정비사업이 진행됐다.

일반적으로 재난 예방 시설이라고 하면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배수로, 제방을 떠올리기 쉽다.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은 방재 기능을 녹지와 산책길, 휴식시설 안에 담았다. 주민이 평소 이용하는 생활공간과 집중호우에 대비하는 시설이 한곳에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마을 안내도에는 개방형 저류지와 지하저류조, 생태하천이 산책로 및 휴식시설과 함께 표시돼 있다. 평상시에는 주민이 자연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걷고 쉬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비가 많이 내릴 때는 물을 잠시 가두어 주변의 침수 위험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평범한 산책길이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방재 기반시설이 되는 셈이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정라동 풍경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면 낮은 산자락과 정라동 주택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 사이로 집들이 보이고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져, 도심의 대규모 공원과는 다른 인상을 준다. 공원과 마을이 분리되지 않고 주민의 생활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모습이다.

갈색 나무 난간이 둘러진 작은 다리와 곳곳의 정자는 걸음을 잠시 멈추기 좋은 쉼터가 된다. 이미 붉게 물든 나무 곁에 짙은 초록색 나무가 남아 있어 가을이 한 번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깊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화려한 단풍 명소의 장관보다는 길가의 나무 한 그루와 햇살이 머무는 벤치, 낙엽이 놓인 풀밭이 차분한 계절감을 만든다.

안전시설은 별다른 일이 없는 평소에는 그 기능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민의 평범한 하루가 이어지려면 지속적인 대비와 관리가 필요하다.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은 재난 예방을 위한 공간도 일상적인 쉼과 여가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생활 가까이에 자리한 작은도서관

마을 산책을 마친 뒤에는 정라동행정복지센터에 있는 작은도서관으로 동선을 이어갈 수 있다. 건물 안 주민 이용 공간 사이에 마련된 도서관 입구에는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밝은 나무 서가와 독서 공간이 이어진다.

대형 도서관처럼 서가가 빽빽하게 채워진 구조는 아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 오히려 주민이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차분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주변 서가에는 그림책과 동화책, 문학작품, 교양서가 구역별로 정리돼 있어 이용자가 관심 분야의 책을 살펴보기 쉽다.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집 지붕 모양의 하얀 구조물 아래 놓인 독서 테이블이다. 작은 집 안에 앉아 책을 읽는 듯한 형태로 꾸며졌으며, 긴 테이블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다. 한쪽에는 책을 펼쳐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자리도 마련돼 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만나는 책

작은도서관의 장점은 생활권 안에서 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집과 가까운 공간에서 그림책과 동화책을 만날 수 있고, 어른들도 일상 중 잠시 자리에 앉아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주민 누구나 책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생활문화 공간의 의미가 분명하다.

서가 한쪽에는 그림책이 전하는 위로,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문구가 놓여 있다. 그림책을 어린이만의 책으로 한정하지 않고 성인 독자도 함께 접할 수 있도록 안내한 구성이다. 짧은 문장과 한 장의 그림도 독자에게 생각할 계기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독서는 정보를 얻는 과정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만나고,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세계를 상상하는 활동이다. 짧은 영상과 수많은 정보가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에서 서가의 책 한 권을 골라 집중해 읽는 시간은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독서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바깥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안전과 문화가 이어지는 마을

영진안 방재시범마을과 정라동행정복지센터의 작은도서관은 쓰임과 형태가 서로 다르다. 방재시범마을은 집중호우로부터 생활공간을 보호하고, 작은도서관은 주민이 가까운 곳에서 책과 문화를 접하도록 돕는다. 두 공간은 모두 주민의 평범한 하루를 더 안전하고 넉넉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도시의 성장은 높고 화려한 건물을 세우는 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재해에 대비하며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기반, 집 가까이에서 걸을 수 있는 녹지, 누구나 부담 없이 책을 펼칠 수 있는 문화공간도 주민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다. 영진안 방재시범마을과 작은도서관은 이러한 시설이 생활권 안에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들어가는 나무 사이를 걷고 작은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는 동선은 유명 관광지의 화려한 풍경과 다른 차분한 여운을 남긴다. 정라동 골목과 주택가, 방재시설을 품은 산책길, 주민 가까이에 놓인 책장이 이어지면서 삼척의 또 다른 일상적 풍경을 이룬다.

가을의 영진안 방재시범마을에서는 자연의 변화와 재난 예방 시설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이어지는 작은도서관에서는 산책 뒤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 공간은 생활의 바깥을 안전하게 지키고, 다른 공간은 책을 통해 생활의 안쪽을 채운다. 삼척 정라동의 두 공간은 안전과 휴식, 독서가 주민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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