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따라 걷는 고성의 가을

가을이 찾아오면 고성의 풍경은 한층 천천히 시선을 붙잡는다. 붉게 물든 산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해 질 무렵 빛을 머금은 바닷가는 계절의 변화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고성에서는 이 풍경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로 기록한 문인들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
고성의 가을 여행은 유명한 명소를 차례로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난 장소를 걷고, 시인이 바라본 자연을 오늘의 풍경과 나란히 놓아보는 문학 여행으로 이어진다. 토성면 성대리와 천진해변, 건봉사, 청간정은 서로 다른 시대의 문학과 고성의 자연이 만나는 장소다.
고성의 자연을 시로 담은 이성선
시인 이성선은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고성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평생의 작품 활동을 이끈 문학적 공간이었다. 그는 고향 성대리와 설악산을 오가며 자연을 바라봤고, 자연과 우주의 관계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표현했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미시령 노을은 작은 자연의 움직임에서 커다란 우주의 감각을 발견한 작품이다. 나뭇잎 하나가 어깨 위로 내려앉는 순간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맞닿는 장면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이 새겨진 이성선 시비는 토성면 성대리 생가터에 세워져 있다. 시비가 자리한 공간에서는 시인이 마음에 담았던 고향 풍경과 오늘날의 고성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단풍이 물든 미시령길과 설악산 주변의 자연은 그의 작품 세계가 형성된 배경을 이해하게 한다.
시비에 적힌 문장을 읽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 고성의 산과 나무는 단순한 여행 배경을 넘어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요소로 다가온다. 이성선이 오래 바라본 자연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는 경험은 고성을 깊이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천진 바다와 최명길의 시
최명길 시인은 1966년 천진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고성의 바다와 청간정 일대에서 젊은 시절의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고성의 해안 풍경은 그의 시적 감각을 움직인 중요한 배경으로 남았다.
고성문학 창간호에는 고성에서 발견된 그의 작품 돌거북이가 물어다준 시가 실린 바 있다. 작품에는 천진의 거북바위와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쓰던 1969년 초가을의 기억이 담겼다.
거북처럼 생긴 바위를 마주한 시인은 그 위에 엎드려 글을 썼다. 바다의 흰 물결 가까이 날아드는 갈매기의 모습이 마음을 붙잡았고, 그 장면은 시의 출발점이 됐다. 특별한 장식보다 눈앞의 바다와 새의 움직임에 집중한 기록이다.
천진해변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거북바위를 통해 시와 실제 장소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파도가 이어지는 해변과 바위, 바다 위를 오가는 갈매기는 최명길이 바라본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천진 바다는 한 시인이 젊은 시절 문학을 이어간 현장이자, 고성의 일상적인 자연이 어떻게 시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같은 해변도 작품의 배경을 알고 바라보면 그 인상이 달라진다.
건봉사에 남은 조영출의 문학
금강산 건봉사에는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조영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영출은 조명암과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으며, 어린 시절 건봉사에서 생활했다. 당시 접한 자연과 사찰의 풍경은 훗날 그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많은 대중가요 가사를 쓴 작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성과 연결된 문학적 흔적을 따라가면 노래뿐 아니라 건봉사의 풍경을 담은 시 칡넝쿨을 만나게 된다.
작품에는 높게 펼쳐진 하늘과 산, 절간에서 울리는 종소리, 땅을 따라 이어지는 칡넝쿨이 등장한다. 화려한 장면보다 사찰 주변의 조용한 길과 식물의 움직임을 통해 계절의 기운을 전한다. 어린 시절 조영출이 바라본 건봉사의 모습도 그 안에 겹쳐 있다.
건봉사에는 그의 작품을 새긴 조영출 시와 노래비가 남아 있다. 오래된 나무와 숲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시에 담긴 사찰의 분위기와 현재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가을의 건봉사는 나무와 숲, 사찰 건물과 길이 차분한 장면을 만든다. 종소리와 칡넝쿨을 노래한 작품을 떠올리며 걷는 길에서는 건봉사가 종교 공간인 동시에 한 문인의 어린 시절과 작품이 머문 장소였다는 점이 선명해진다.
청간정에서 만나는 관동별곡
고성을 노래한 문학의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청간정에 닿는다. 청간정은 오래전부터 많은 문인이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시를 남긴 곳이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적 특징과 빼어난 경관이 문학의 배경이 됐다.
조선시대 문인 송강 정철은 1580년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하며 관동의 명승을 둘러봤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마주한 고성의 풍경을 관동별곡에 담았다.
작품에는 고성을 지나 삼일포를 찾고, 옛 신선의 자취를 떠올리며 선유담과 영랑호, 청간정과 만경대를 바라보는 내용이 이어진다. 한 장소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고성의 여러 명승을 따라 이동하며 풍경과 옛이야기를 함께 풀어낸 대목이다.
관동별곡 속 고성은 수백 년 전의 자연과 문학적 상상이 포개진 공간이다. 청간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정철이 작품에 남긴 장소의 흐름과 오늘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고성의 넓은 경관은 여전히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청간정은 옛 문학을 글로만 읽는 데서 나아가 작품 속 장소를 실제 풍경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한 편의 시로 이어지는 고성 여행
토성면 성대리 생가터의 이성선 시비에서는 고향과 자연을 향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천진해변과 거북바위에서는 바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최명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건봉사의 조영출 시와 노래비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작품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주며, 청간정은 정철의 관동별곡과 조선시대 문학의 시간을 현재로 연결한다.
네 장소는 모두 고성에 있지만 각기 다른 풍경과 시대를 품고 있다. 산과 고향 마을을 노래한 시, 해변에서 시작된 시, 사찰의 길과 식물을 담은 시, 관동의 명승을 따라간 가사가 한 지역 안에서 이어진다.
누군가 바라본 풍경을 다시 바라보고, 그 풍경에 붙여진 작품을 읽는 일은 고성을 만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가을빛이 번지는 산과 바다, 사찰과 정자 사이를 따라가다 보면 고성의 자연이 여러 세대의 문인에게 오래도록 글을 쓰게 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고성의 가을은 눈앞의 경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본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태어난 문장이 장소마다 남아 있다. 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여정 속에서 익숙한 산과 바다도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